아침 안개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검놀음을 하고 있었다.
“받아라, 내 검을 받아라!”
“하하! 넌 벌써 죽었어!”
순진한 웃음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그들 무리 속에서 이강현도 막대를 쥐고 있었으나, 그의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현아, 너도 휘둘러야지! 왜 멀뚱히 서 있어?”
한 아이가 다가와 막대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재촉했다.
“…괜히 휘두르면 다칠까 봐.”
짧은 대답이었지만, 말끝엔 아이답지 않은 무게가 배어 있었다.
“뭐야, 겁쟁이잖아!”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이강현은 그저 나무검을 들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느리고 어눌한 동작이었으나, 아이들의 가슴을 알 수 없이 눌러오는 힘이 있었다.
“저게… 왜 좀 무섭지?”
아이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곧 다시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홀로 남은 이강현은 막대를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검은 베는 게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아이답지 않은 고요를 품고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마을 어귀 주막.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눈빛은 깊고 멀리까지 닿아 있는 듯했다. 무영노인이었다.
그는 아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무로 하늘을 찌를 수 있겠느냐?”
이강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나무로는 못 찌르죠. 그냥 부러질 거예요.”
노인은 소리 내 웃지도 않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부러져도 남는 게 있지. 그 파편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갈 수도 있다. 세상은 흐름 속에 있다. 강물도, 바람도, 검끝도.”
주막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냥 늙은이의 풍류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강현은 그 속에서 다른 깊이를 읽어냈다.
‘그는 강호의 언어로 말하지만, 바라보는 시야는 달랐다. 마치 한 겹 더 깊은 세상을 본 듯한 눈빛… 전생의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던 말들이, 이번 생엔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며칠 뒤,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흙을 던졌다. 흙덩이가 날아와 이강현의 뺨을 스쳤다. 아이들이 폭소했다.
“너도 던져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그냥 씻으면 돼.”
짧은 대답에 아이들은 다시 그를 겁쟁이라 놀리며 달아났다.
홀로 남은 그는 묵묵히 뺨을 닦았다.
‘전생의 나는 모욕을 참는 걸 치욕이라 여겼다. 그래서 검을 뽑고, 싸우고, 다시 원한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알겠다. 모욕은 남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붙잡을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흩어버리면 사라지고, 쥐면 무게가 된다.’
어린 눈빛에 어른도 감히 닿기 어려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을 어른들은 종종 수군거렸다.
“강현이는 영리하긴 한데… 애답지가 않아.”
“어른처럼 말하니 괜히 서늘해.”
그 말에 이강현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섭게 보이나요?”
아이 같은 목소리였지만, 눈빛은 오래 묵은 쓸쓸함을 머금고 있었다.
밤, 홀로 앉아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걸 두려워한다. 전생의 무림맹도, 사문도 그랬다. 낯선 것을 보면 곧 검을 뽑았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달라야 한다. 두려움이 칼이 되지 않도록, 내가 먼저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달빛이 마을을 은빛으로 덮었다.
이강현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달은 매일 모양이 바뀌는데, 왜 사라지진 않을까.”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영노인의 목소리가 잔잔히 흘렀다.
“변하는 것이 곧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흩어져도 길이 있고, 공허에도 빛이 있다.”
이강현은 눈을 감았다.
‘그래, 달은 줄어들고 차올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 전생의 잘못도 사라지진 않겠지.
그러나 그것을 안고도 걸어갈 수 있다. 잊는 게 아니라, 짊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새 길이리라.’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린 얼굴은 아직 미숙했으나, 눈동자에는 아이답지 않은 깊은 빛이 번지고 있었다.
'연재 > 웹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생록 — 제6편 흐름 속의 작은 변화 (0) | 2025.10.04 |
---|---|
📖 전생록 5편 — 흐름을 삼키는 심법 (0) | 2025.10.03 |
📖 전생록 – 제3편 (제11~15장) (1) | 2025.10.03 |
📖 전생록 – 제2편 (제6~10장) (0) | 2025.10.03 |
📖 전생록 – 제1편 (제1~5장) (0) | 202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