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

전생록 — 제7편 잊힌 기연

새벽의 바람이 희미하게 산등성이를 어루만질 때, 이강현은 눈을 떴다.어젯밤 내린 이슬이 옷깃을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숨결은 어제보다 깊어졌고, 몸은 고요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작은 선택이 흐름이 되고, 그 흐름이 나를 만든다…’강현은 뒷산 골짜기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그가 향한 곳은 평소와는 다른 산의 외진 갈래, 오래전 버려진 사찰터였다.아이들은 귀신이 나온다며 근처에도 가지 않지만, 강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사찰터는 허물어져 있었다.기왓장 사이로 잡초가 무성했고, 한쪽 벽은 무너져 있었다.하지만 그 안쪽, 바닥 일부가 이상하게 깔끔했다.강현은 눈을 좁히고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그곳에 감춰져 있던 것은 작은 석함.그리고 그 안에는 낡은 고서 한 권이 누워 있었다.‘…소연기결(素緣氣訣..

연재/웹소설 2025.10.04

전생록 — 제6편 흐름 속의 작은 변화

새벽의 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이강현은 뒷산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호흡은 더 깊고 고요해졌고, 이전보다 몸도 마음도 덜 떨렸다.별빛이 사라지고, 새벽빛이 천천히 땅을 비추기 시작했다.‘어제의 숨결이, 오늘의 선택으로 이어지겠지.’그는 천천히 일어나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장터로 향하는 길목,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의 목청이 골목을 울리고 있었다.작은 주막 앞에서 술잔을 닦고 있는 노인은 중얼거렸다.“시끄러운 녀석들, 이 동네 분위기 다 흐트러지게…”주민 몇몇은 불평 섞인 눈길로 모여 있었다.강현이 지나가려는 찰나, 어떤 아이가 균형을 잃고 짐을 흘렸다.바구니 속 곡식이 땅바닥에 떨어져 흩어졌고, 어른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뭐 하는 짓이냐! 너같이 어설픈 놈이 뭘 해—”말끝이 상인들의 시..

연재/웹소설 2025.10.04

📖 전생록 5편 — 흐름을 삼키는 심법

해가 기울 무렵,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간 뒤, 마을 뒷산은 고요에 잠겼다.바위 위에 홀로 앉은 이강현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어린아이의 작은 어깨였지만, 숨결은 또래와 달리 일정하고 깊었다.‘전생의 나는 수많은 심법을 익혔다. 그러나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았다.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리다 내맥을 상했고, 조급히 길을 좇다 본질을 놓쳤다.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다. 아직 어린 몸, 굳지 않은 근맥. 잘못된 습관이 스며들지 않은 맑은 그릇이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시작이다.’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바람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고, 내쉴 때는 숲의 적막이 한층 짙어졌다.어린아이의 호흡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 주위의 공기마저 조용히 울림을 띠었다.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가..

연재/웹소설 2025.10.03

📖 전생록 제4편 – 어느 한가로운 일상

아침 안개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검놀음을 하고 있었다.“받아라, 내 검을 받아라!”“하하! 넌 벌써 죽었어!”순진한 웃음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그들 무리 속에서 이강현도 막대를 쥐고 있었으나, 그의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강현아, 너도 휘둘러야지! 왜 멀뚱히 서 있어?”한 아이가 다가와 막대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재촉했다.“…괜히 휘두르면 다칠까 봐.”짧은 대답이었지만, 말끝엔 아이답지 않은 무게가 배어 있었다.“뭐야, 겁쟁이잖아!”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이강현은 그저 나무검을 들어 허공을 가로질렀다. 느리고 어눌한 동작이었으나, 아이들의 가슴을 알 수 없이 눌러오는 힘이 있었다.“저게… 왜 좀 무섭지?”아이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곧 다시..

연재/웹소설 2025.10.03

📖 전생록 – 제3편 (제11~15장)

제11장. 문 너머의 조짐무영노인은 강현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이 아이의 혼 속에 잠들어 있는 파동… 이계의 기운이 분명하다. 만약 문이 다시 열린다면…”무영은 본래 차원을 넘어온 감시자였다. 먼 세계에서 온 그는 이계 관문을 넘어 무림에 도달했고, 이곳에 숨어 세계의 균형을 지켜보며 살아왔다. 세월은 그의 이름을 잊게 했지만, 기억은 여전히 저편의 언어로 살아 있었다.그가 강현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오래전 전해진 예언 때문이다.‘두 개의 생이 겹칠 때, 새로운 문이 열린다.’무영은 강현의 영혼에 그 조짐을 보았고, 바로 그때부터 조심스레 그의 곁을 지켜온 것이다.수련장의 한켠에는 흰 호랑이 한 마리가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백호는 무영노인이 수년 전 이계에서 데려온 수호 짐승이..

연재/웹소설 2025.10.03

📖 전생록 – 제2편 (제6~10장)

제6장. 새벽의 수련마을은 깊은 산골에 숨어 있었다. 밭은 좁고 척박하여 언제나 곡식이 모자랐다.아이들은 배고픔을 달래며 뛰놀았고, 허름한 초가집 사이로 가난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이강현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병석에 누운 아버지와, 날마다 장에 나가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강현은 어린 나이에도 집안을 지탱해야 한다는 부담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그날도 새벽, 그는 몰래 집을 나섰다.뒷산에 올라 나무에 매달리며 팔을 당겼다.손바닥은 터져 피가 배어 나왔고, 호흡은 가빠왔다.“이번엔 다르다. 내가 약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해가 산 너머로 오르며, 피와 땀에 젖은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멀리서,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제7장. 아침의 친구마을 어귀는 장에 나서는 사..

연재/웹소설 2025.10.03

📖 전생록 – 제1편 (제1~5장)

제1장. 다시 눈을 뜨다세상은 언제나 냉혹했다.강호에서든, 속세에서든, 살아남으려면 발버둥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발버둥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이 있다.사내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싸늘한 피가 발목을 적셨고, 검은 그림자가 코앞에 드리워졌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결국 남은 건 패배와 후회뿐이었다.“나는 왜… 이렇게 끝나는가.”숨은 가빠왔고, 시선은 흐려졌다.동료들은 등을 돌렸고, 믿었던 이는 칼을 겨눴다. 사랑도, 의리도, 노력도, 결국 아무것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세상은 끝내 잔혹했고, 삶은 너무 짧았다.그 순간, 하늘은 검게 뒤틀리며 낯선 빛이 번졌다.의식이 끊어지려는 찰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떨림을 느꼈다. 무너져가던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 ..

연재/웹소설 2025.10.03